질문의 자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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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로 끝나는 문장들
회사에서든 일상에서든 물음표로 끝나는 말은 생각보다 많이 오간다. 근데 그중에 진짜 질문이 얼마나 되나 헤아려보면 꽤 답답해진다. 형태는 분명히 질문인데 그 안에 궁금한 게 없는 문장들이 있고, 나는 그런 걸 마주칠 때마다 어딘가 좀 불편하다.
내가 모르는 걸 배우려고 묻는 거니까 질문에는 궁금한 마음이 들어 있어야 한다.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상대가 아는 걸 나에게 옮겨오는 일인데, 궁금하지도 않으면서 물음표만 붙여놓으면 그건 질문 흉내를 낸 다른 말이다.
질문의 탈을 쓴 것들
궁금함이 빠진 자리에는 대신 다른 게 들어간다.
제일 흔한 건 시험이다. “이거 왜 이렇게 동작하는지 아세요?” 이 문장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진짜 몰라서, 상대가 알 것 같아서 물은 거면 좋은 질문이다. 근데 답을 이미 알면서 상대가 아는지 확인하려고 던지면 같은 문장이 서열 확인으로 바뀐다. 이렇게 물은 사람은 아무것도 안 배운다. 애초에 배울 생각이 없었으니까.
주장을 질문처럼 하는 경우도 많다. “이렇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정말 어느 쪽이 나은지 확신이 없어서 상대 판단을 듣고 싶은 거라면 질문이 맞다. 근데 답이 아니라 동의를 원하는 거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데, 이건 반박이 돌아왔을 때 당황하거나 불쾌해하는 걸 보면 대체로 티가 난다. 답을 이미 정해놓고 물으면 그냥 의견이다.
추궁도 있다. “왜 이렇게 하셨어요?”는 전혀 다른 두 문장이 될 수 있어서, 진짜 이유가 궁금해서 물을 수도 있고 잘못을 확인시키려고 물을 수도 있다. 뒤쪽이면 묻는 사람이 듣고 싶은 건 설명이 아니고 “제가 잘못했네요”라는 말이다.
과시로 쓰이기도 한다. 컨퍼런스 Q&A에서 “질문이라기보단 코멘트인데요”로 시작하는 발언이 딱 그렇다. 이런 말은 연사가 아니라 청중을 향해 있다. 내가 이만큼 안다는 걸 보여주려고 마이크를 잡은 쪽에 가깝다.
이걸 가르는 게 문장의 형태는 아니다. 위에 적은 어떤 문장도 그 자체로 나쁘지 않고, 같은 문장이 진짜 질문이 되기도 하고 시험이나 추궁이 되기도 한다. 가르는 건 묻는 사람의 마음이고, 묻는 맥락이고, 상대방과의 관계다. 그래서 듣는 사람은 문장보다 그 뒤에 있는 의도를 읽고, 대부분 꽤 정확하게 읽어낸다.
답을 듣고 바뀔 준비
듣는 쪽이 의도를 읽는다면 묻는 쪽은 스스로를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확인하는 기준을 하나 가지고 있다.
답을 듣고 내 생각이 바뀔 준비가 되어 있는가.
어떤 답이 돌아와도 내 입장이 안 바뀐다면 그건 질문이 아니다. 시험하는 쪽은 답을 이미 아니까 바뀔 게 없고, 주장하는 쪽은 답을 정해놨으니 바뀔 생각이 없고, 추궁하는 쪽은 답에 관심조차 없다. 이 기준 하나로 가짜 질문은 대부분 걸러진다.
반대로 여기서 걸러지지 않는 질문이라면, 그걸 묻는 것 자체가 일종의 선언이 된다. 나는 이 부분을 모르고, 당신 답을 듣고 내 생각을 고칠 마음이 있다고 밝히는 셈이니까. 그래서 진짜로 물으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모른다는 걸 드러내야 하고, 틀릴 수 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하니까.
질문이 무기가 되는 곳
이게 개인의 태도 문제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데, 조직으로 넘어가면 좀 더 고약해진다.
질문을 시험이나 추궁으로 쓰는 사람이 있는 조직에서는 질문 자체가 공격으로 읽힌다. 누가 손을 들고 뭔가를 물으면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긴장한다. 저 질문 의도가 뭘까, 누구를 겨냥한 걸까. 이런 데서 제일 합리적인 선택은 그냥 질문하지 않는 거다.
그래서 모른다고 말하기가 부담스러운 조직에서는 진짜 질문이 점점 사라진다. 일단 고개부터 끄덕이고, 회의 끝나고 따로 알아보거나, 그냥 모르는 채로 일한다. 서로에게서 배우는 통로가 그렇게 하나씩 닫힌다. 질문을 무기로 쓰는 사람은 그 순간엔 우위에 서겠지만, 조직 전체는 그만큼 배울 기회를 잃는다.
그래서,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궁금한 게 진짜라면 그걸 잘 전달하려고 내가 지키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내가 어디까지 이해했는지를 앞에 꺼내놓는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A인데, B가 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식이다. 이렇게 물으면 답하는 사람이 내 이해가 어디서 어긋났는지 보고 딱 그 지점부터 설명할 수 있다. 상대 시간을 아껴주는 일이기도 하고, 내 생각을 검증받는 일이기도 하다. 두루뭉술하게 “이거 어떻게 되는 거예요?”라고 묻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얻는다.
의견이면 의견이라고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질문 형태로 포장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게 더 부드러워 보이니까. 근데 그렇게 하는 순간 상대는 내 문장을 해독하는 부담을 떠안는다. 이게 진짜 질문인가, 사실은 반대 의견인가. “질문이 아니라 제 생각인데요”를 앞에 붙이는 것만으로 이 모호함이 사라지고, 의견은 의견대로 질문은 질문대로 다뤄질 때 대화가 깨끗해진다.
스스로 찾을 수 있는 건 먼저 찾아본다. 질문을 아끼라는 얘기는 아니고, 검색 한 번이면 나오는 걸 물어보는 건 내 5초를 아끼려고 남의 5분을 쓰는 일이라서 그렇다. 찾아봤는데도 모르겠으면 그때는 주저 없이 물어야 하고, 찾아본 흔적과 같이 물으면 그 자체로 좋은 질문이 된다.
마지막으로, 답을 듣고 난 다음까지가 질문이다. 답을 듣고 “아, 그러면 제가 생각했던 A는 틀린 거네요”라고 돌려주는 것까지가 하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이해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보여줘야 답해준 사람도 자기 설명이 전달됐는지 알 수 있다. 질문은 던지고 끝나는 게 아니라 주고받는 거니까.
답을 알고 물어도 되는 경우
물론 답을 알면서 묻는 게 전부 나쁜 건 아니다.
멘토가 멘티에게 던지는 유도 질문이 대표적이고, 소크라테스식 문답이라는 오래된 형식도 있다. 근데 이건 가르치고 배우기로 서로 합의한 관계에서나 통하는 얘기다. 멘토링 자리에서 “이 경우엔 어떻게 될 것 같아요?”라고 묻는 것과 회의에서 동료에게 기습적으로 같은 질문을 던지는 건 전혀 다른 일이다. 앞의 것은 상대를 키우려고 하는 거고, 뒤의 것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완곡한 표현도 마찬가지다. “~하는 게 어떨까요?”는 우리말에서 의견을 부드럽게 꺼내는 방식이기도 해서, 이걸 전부 가짜 질문이라고 몰아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말을 부드럽게 하더라도 그게 의견이라는 사실만큼은 드러나야 한다고 본다. 상대가 내 문장의 정체를 추측하게 만드는 순간, 완곡함은 배려를 넘어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이 질문의 문턱을 높이는 글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은 질문의 조건을 이렇게 늘어놓고 나면 오히려 질문하기가 부담스러워질 수도 있다. 내 질문이 충분히 다듬어졌나, 혹시 가짜 질문처럼 보이진 않을까. 근데 그런 검열 끝에 질문을 삼키는 게 이 글이 제일 경계하는 결말이다. 서툴러도 진짜인 질문이 그럴싸한 가짜 질문보다 백 배 낫다.
결국 필요한 건 하나다. 정말 궁금한 것. 그게 있으면 질문의 형태가 좀 어설퍼도 질문으로서는 충분하고, 그게 없으면 아무리 정교하게 다듬어도 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