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가요, 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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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 것 같은데요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X가 가능한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듣는 답이 있다. “될 것 같은데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겉보기엔 질문이 오가고 답이 돌아온 멀쩡한 대화다. 근데 나는 여기서 사실 아무 일도 안 일어났다고 본다. 물은 사람은 판단할 근거를 하나도 못 받았고, 답한 사람은 자기 감을 말했을 뿐이니까. 그런데도 회의는 그 말 한마디로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고, 몇 주 뒤에 누군가는 “그때 된다고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게 된다.
절반은 이렇게 묻는 방식 때문이다.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에는 세상 모든 일이 가능 혹은 불가능, 둘 중 하나로 딱 떨어진다는 가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답은 거의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능성은 의견이 아니다
어떤 X가 가능하려면 보통 여러 조건이 같이 갖춰져야 한다. 편의상 A, B, C, D, E라고 하자. 하나씩 뜯어보면 조건은 대개 세 갈래로 갈린다. 지금도 되는 것, 돈과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 그리고 아예 방법이 없는 것.
A와 B는 지금도 된다. C와 D는 비용이 들지만 못 할 이유는 없다. 근데 E는 현재 기술로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X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온다. “E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 답과 “안 될 것 같은데요” 사이에는 꽤 차이가 있다. 조건을 따져보고 나온 답은 남이 따라가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조건 목록에 빠진 게 없는지, E가 정말 안 되는 게 맞는지 하나씩 짚어보면 되니까. 감으로 나온 답은 짚어볼 데가 없다. 감에 맞설 수 있는 건 또 다른 감뿐이라서, 돌아오는 말도 “저는 될 것 같은데요”가 전부다.
그러니까 가능성은 의견으로 정할 게 아니라 조건을 하나씩 따져서 계산해내는 쪽에 가깝다. 답을 외우고 있을 게 아니라 그때그때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직감의 대결
조건 없이 결론만 오가는 회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다들 한 번쯤 봤을 거다.
“될 것 같은데요”와 “어려울 것 같은데요”가 부딪치면, 그때부터 회의는 근거를 주고받는 게 아니라 직감끼리 힘겨루기를 하게 된다. 직감은 서로를 검증할 수가 없으니 승부는 엉뚱한 데서 갈린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누가 연차가 높은지, 누가 더 자신 있어 보이는지. 그렇게 정해진 결론은 회의실 문을 나서자마자 흔들린다.
조건을 쪼개놓고 이야기하면 같은 논쟁도 다르게 흘러간다. “저는 C가 어려워 보여서 부정적이에요”와 “C는 이런 방법으로 풀 수 있지 않아요?”가 부딪치는 건 건강한 충돌이다. 확인해보면 되는 다툼이니까. 회의가 끝났을 때 남는 게 “누가 이겼는지”가 아니라 “C에 실제로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자”라는 일감이 된다. 의견 충돌이 이렇게 일감으로 바뀌는 게, 조건을 쪼개놓고 이야기할 때 회의에서 제일 크게 달라지는 부분이다.
안 되던 게 되는 때가 온다
이렇게 쪼개놓으면 얻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나는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답이 언제 바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E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는 ‘지금은’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다. E가 풀리고 나면 X는 될지 안 될지의 문제가 아니라 돈을 얼마나 쓸 거냐의 문제가 된다. 그리고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E는 생각보다 자주 풀린다. 스마트폰에 GPS와 무선 인터넷이 실리자 “지나가는 차를 앱으로 부른다”는 아이디어는 공상에서 사업이 됐고, LLM 추론 비용이 수백분의 일로 떨어지자 그 위에서 불가능하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론만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조건이 풀리는 순간을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나는 이 얘기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줄이곤 한다. 결론을 캐시하지 말고, 조건을 캐시하라.
“X는 불가능하다”라고 결론만 저장해두면, 세상이 바뀌어도 그 캐시는 만료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 X 얘기가 다시 나와도 반사적으로 “그거 안 돼요”가 튀어나온다. 반면 “X는 E 때문에 안 된다”라고 조건째로 기억하고 있으면, 어느 날 지나가듯 본 뉴스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가격 인하, 새로 열린 API, 규제 변화 같은 소식에서 “어, E가 풀렸네. X를 다시 볼 때가 됐네”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같은 뉴스를 누구는 그냥 흘려보내고 누구는 기회로 알아채는 이유가 여기서 온다.
된다 안 된다는 말의 무게
“X가 가능한가요?”라는 질문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에게 묻는 건 당연한 일이고, 주니어가 이 질문을 던지는 건 배우는 과정이다. 근데 시니어가 이 질문을 분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질문을 조건으로 쪼개는 일이야말로 시니어에게 기대되는 몫이니까. 같은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질문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일을 남에게 넘기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 무게를 더 크게 진다. 된다 안 된다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어디에 쓸지 정하는 일이다. 분해 없이 “불가능해요”라고 말하는 리더는 팀이 가질 수 있었던 선택지를 지워버리고, 분해 없이 “가능해요”라고 말하는 리더는 팀이 감당해야 할 약속을 대신 해버린다. 어느 쪽이든 그 대가는 말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이 치른다.
결국 사람들이 오래 믿는 건 따져볼 수 있는 판단이다. 조건까지 같이 내놓으면 남이 하나씩 짚어볼 수 있고, 그렇게 짚어봤는데도 말이 맞으면 그때 믿음이 생긴다. 직함이 있으면 일단 사람들이 들어는 주는데, 그건 믿음이랑 좀 다르다. 믿음은 그렇게 몇 번씩 확인을 거치고 나서야 쌓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쪼개서 본다고 정답이 나오는 건 아니다.
조건 목록부터 틀릴 수 있다. A부터 E까지 늘어놓고 다 따져봤는데 알고 보니 F라는 조건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고,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E에 사실 우회로가 있었을 수도 있다. 모든 판단을 다 쪼개볼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정은 감으로 빠르게 내리는 게 맞기도 하다.
다만 쪼개서 내려둔 판단은 틀려도 어디서 틀렸는지 되짚을 수 있다. 조건 목록은 고치면 되고, 고쳐진 목록은 다음 판단에 다시 쓰인다. 감은 틀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고는 복기할 재료가 없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니까 분해는 맞히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 틀렸을 때 배울 수 있는 형태로 판단을 남겨두는 기술에 가깝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회의도 직감의 대결에서 조건을 따지는 쪽으로 조금씩 바뀌어간다. 나는 그런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라야 회의실 바깥에서도 살아남는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