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가요, 라는 질문

· 6분

될 것 같은데요

일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다. “X가 가능한가요?” 그리고 그만큼 자주 듣는 답이 있다. “될 것 같은데요.” “어려울 것 같은데요.”

겉보기에는 질문이 오가고 답이 돌아온, 멀쩡한 대화다. 근데 나는 이 대화에서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물은 사람 손에는 판단할 근거가 쥐어지지 않았고, 답한 사람은 자기 감을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회의는 이 문장을 딛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고, 몇 주 뒤에 누군가는 “그때 된다고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게 된다.

문제의 절반은 “가능한가요?”라는 질문의 생김새에 있다. 이 질문은 세상 모든 일이 가능 아니면 불가능, 둘 중 하나로 딱 떨어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근데 실제 세계의 답은 거의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가능성은 의견이 아니다

어떤 X가 가능하려면 보통 여러 조건이 함께 갖춰져야 한다. 편의상 A, B, C, D, E라고 하자. 하나씩 뜯어보면 조건들은 대개 세 갈래로 나뉜다. 지금도 되는 것, 돈과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 그리고 물리적으로 안 되는 것.

A와 B는 지금도 된다. C와 D는 비용이 들지만 못 할 이유는 없다. 근데 E는 현재 기술로는 방법이 없다. 그러면 X에 대한 답은 저절로 나온다. “E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

이 답과 “안 될 것 같은데요” 사이에는 꽤 큰 거리가 있다. 앞의 것은 따라가면 검산이 되는 결론이고, 뒤의 것은 그냥 감이다. 결론은 남이 따져볼 수 있다. 조건 목록에 빠진 게 없는지, E가 정말 안 되는 게 맞는지, 판정 하나하나가 맞는지를 짚어볼 수 있다. 감은 그게 안 된다. 감에 맞설 수 있는 건 또 다른 감뿐이라서, 돌아오는 말도 “저는 될 것 같은데요”가 전부다.

가능성은 의견이 아니라 조건들의 함수다. 함수라면 답을 외울 게 아니라 계산할 수 있어야 하고.

직감의 대결

조건 없이 결론만 오가는 회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는 다들 한 번쯤 봤을 거다.

“될 것 같은데요”와 “어려울 것 같은데요”가 부딪치는 순간부터, 회의는 근거를 주고받는 자리가 아니라 직감끼리 힘겨루기하는 자리가 된다. 직감은 서로를 검증할 수가 없으니 승부는 결국 엉뚱한 데서 갈린다. 누구 목소리가 큰지, 누가 연차가 높은지, 누가 더 자신 있어 보이는지. 그렇게 정해진 결론은 회의실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분해가 끼어들면 같은 충돌도 다르게 흘러간다. “저는 C가 어려워 보여서 부정적이에요”와 “C는 이런 방법으로 풀 수 있지 않아요?”가 부딪치는 건 건강한 충돌이다. 확인해보면 되는 다툼이니까. 회의가 끝났을 때 남는 게 “누가 이겼는지”가 아니라 “C에 실제로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알아보자”라는 일감이 된다. 의견 충돌이 검증 가능한 일감으로 바뀌는 것. 분해가 회의에 가져다주는 가장 큰 변화가 이거라고 생각한다.

불가능은 대부분 시한부다

분해로 얻는 게 하나 더 있는데, 나는 오히려 이쪽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답이 언제 바뀌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

“E 때문에 지금은 불가능하다”라는 결론에는 유통기한이 적혀 있다. E가 풀리는 순간 X는 불가능의 문제에서 비용의 문제로 넘어온다. 그리고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면 E는 생각보다 자주 풀린다. 스마트폰에 GPS와 무선 인터넷이 실리자 “지나가는 차를 앱으로 부른다”는 아이디어는 공상에서 사업이 됐고, LLM 추론 비용이 수백분의 일로 떨어지자 그 위에서 불가능하던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결론만 기억하고 있던 사람들은 조건이 풀리는 순간을 그냥 지나쳤다.

그래서 나는 이 얘기를 한 문장으로 이렇게 줄이곤 한다. 결론을 캐시하지 말고, 조건을 캐시하라.

“X는 불가능하다”라고 결론만 저장해두면, 세상이 바뀌어도 그 캐시는 만료되지 않는다. 몇 년이 지나 X 얘기가 다시 나와도 반사적으로 “그거 안 돼요”가 튀어나온다. 반면 “X는 E 때문에 안 된다”라고 조건째로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어느 날 지나가듯 본 뉴스 하나가 신호가 된다. 가격 인하, 새로 열린 API, 규제 변화 같은 소식에서 “어, E가 풀렸네. X를 다시 볼 때가 됐네”를 스스로 알아차리는 것. 같은 뉴스가 누구에게는 그냥 소식이고 누구에게는 기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판정은 남의 시간을 배분한다

“X가 가능한가요?”라는 질문 자체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에게 묻는 건 당연한 일이고, 주니어가 이 질문을 던지는 건 배우는 과정이다. 근데 시니어가 이 질문을 분해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다음 사람에게 넘긴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다. 질문을 조건으로 쪼개는 일이야말로 시니어에게 기대되는 몫이니까. 같은 문장이 누군가에게는 질문이고, 누군가에게는 자기 일을 남에게 넘기는 행위가 된다.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이 무게는 더해진다. 된다/안 된다는 판정은 그 자체로 다른 사람들의 시간을 배분하는 행위다. 분해 없이 “불가능해요”라고 말하는 리더는 팀이 가질 수 있었던 선택지를 지워버리고, 분해 없이 “가능해요”라고 말하는 리더는 팀이 감당해야 할 약속을 대신 해버린다. 어느 쪽이든 그 값은 판정한 사람이 아니라 실행하는 사람들이 치르게 된다.

사람들이 결국 어떤 판단을 신뢰하는지 생각해보면, 답은 검증할 수 있는 판단이다. 조건과 함께 내놓은 판정은 남이 따져볼 수 있고, 따져봤는데도 무너지지 않았을 때 신뢰가 쌓인다. 권위는 직함에서 나올 수 있어도, 신뢰는 검증을 통과한 횟수에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다고 분해가 정답을 보장해준다는 얘기는 아니다.

조건 목록부터 틀릴 수 있다. A부터 E까지 늘어놓고 판정을 마쳤는데 알고 보니 F라는 조건이 숨어 있었을 수도 있고, 불가능하다고 못 박은 E에 사실 우회로가 있었을 수도 있다. 모든 판단을 분해할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결정은 감으로 빠르게 내리는 게 맞기도 하다.

다만 분해해둔 판단은 틀려도 어디서 틀렸는지 되짚을 수 있다. 조건 목록은 고치면 되고, 고쳐진 목록은 다음 판단에 다시 쓰인다. 감은 틀리고 나면 남는 게 없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말고는 복기할 재료가 없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알아차리기 어렵다.

그러니까 분해는 맞히기 위한 기술이라기보다, 틀렸을 때 배울 수 있는 형태로 판단을 남겨두는 기술에 가깝다. 이런 형태로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회의는 직감의 대결에서 조건의 검증 쪽으로 조금씩 옮겨가고, 나는 그런 회의에서 나온 결론이라야 회의실 바깥에서도 살아남는다고 믿는다.